나는 쫓기고 있었다.
일상에게. 혹은 적에게. 혹은 나도 알지 못하는 덩어리에게.
[0] 그리고 한순간 지구는 멸망했다.
의문의 여지도 없고 반문할 이유도 없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한 순간이었다.
- 멍청한 지도층이 최종 무기를 사용했고 지구는 멸망했다. -
아직도 나는 지구가 없어졌던 이유가 그것이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그렇게 알고 있다. 어쩌면 그 이유가 사실은 지구 반대편에 충돌한 운석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것은 사실 상관없었다.
수없이 길고 긴 우주의 연표 속에서 지구가 멸망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나에게는 긴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짧은 시간 동안.
그 상태가 몇 초, 혹은 몇 년이나 지속되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나는 시계를 보지 않고 시계는 내 주위 어디에도 없어 그저 나 홀로 외로이 유영하며 별빛을 보았던 때문이다. 어쩌면 한 겁 정도는 지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유영하며 있던 어느 순간 나는 지구 위에 다시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많은 것이 제 자리로 돌아왔다. 제자리에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와 있을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유영은 내 환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완전했다. 뭔가 뒤틀려 있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금의 세계는 불완전하게 돌아와 있다.
그리고 멸망의 기억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내 정신을 의심해야 할 정도로.
[1] 나는 여전히 쫓기고 있다.
『치노! 뭐하는 거야 빨리 도망치지 않고!』
독하게 증류한 사과술병에 박은 심지에다가 불을 붙여 던지며 니트가 외쳤다. 잠시 회상에 빠져 도약을 늦게 한 사이 개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 같다. 아쉽게도 화염병은 빗나갔다. 화염병을 따라간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발에 느껴지는 진동에 나무 아래를 내려다보니 개들이 나무에 톱질을 해 대고 있었다. 내가 있는 나무가 잘리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다시 니트의 화염병이 날았다. 이번에는 톱질을 하던 놈들 중 하나에 정통으로 맞았다. 개는 깨갱하는 비명을 지르며 불이 붙은 대가리를 감싸고 데굴데굴 굴렀다. 나이스 타이밍.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도약했다. 몇 미터쯤 떨어지던 내 몸은 어느 순간 옆으로 퉁겨나듯 움직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개들이 던져대는 돌멩이의 사정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몸은 공기에 휩싸여 부드럽게 날았다. 나는 기류를 느낄 수 있었고 내 등 뒤에 분명히 존재하는, 지금 내 시야에만 보이지 않는 날개의 깃털 하나하나를 조정하여 복잡한 비행을 할 수 있었다. 바람은 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아찔아찔한 느낌에 나는 조금씩 비틀거렸다. 비록 힘은 들었지만 비행은 언제나 감격적인 하나의 의식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니트는 나무 꼭대기를 뛰어 이동하고 있었다. 나무 꼭대기들은 가끔 바람에 살랑댔지만 그녀가 발을 디딘 나무 꼭대기는 한 치의 휘어짐도 없이 곧게 펴져 그녀의 도약을 굳건히 지지해 주었다. 그녀도 도약하며 희열을 느끼는지 표정이 밝았다.
개들은 우리의 속력을 전혀 따라오지 못하고 저 멀리 처져 있었다. 그들의 발달된 후각으로도 우리를 따라오지는 못하리라.
우리는 그렇게 한 시간 이상을 이동해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곳에 도착했다.
내 방에 도착한 나는 샤워실로 향했다. 물을 틀어 후각을 교란시키는 향을 먼저 씻어냈다.
향이라고는 하지만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 다음 등이 훤히 드러나는 슈트는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나는 홀로 이동했다.
홀에는 니트 외에도 여럿이 있었다. 모두 나의 동료였다.
[2] 지구가 다시 생겨났을 때 나는 그대로였다.
내 발이 지구에 다시 닿았을 때 나는 가방을 메고 공상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지구 위에 다시 서 있던 나를 발견한 순간 나는 참을 수 없이 배고프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리고는 주위의 나무에 사과가 열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게 푸른색이라는 것을 느꼈고, 그 옆에 有毒, TOXIC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다는 것도 알아챘고, 또한 내가 영어와 한자에는 젬병이고 못 읽으며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그 사과를 몇 개 따내 와삭와삭 먹어치운 후 몇 개를 더 따서 메고 있던 가방에 집어넣었다.
물론, 그것이 유독함이라고 쓰여 있었다 라는 것은 한참 후에나 알았다. 정말이다.
나는 일단 걸었다. 길에서는 몇몇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은 서로 시선을 피하며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의 목에서 가는 선의 목걸이가 공통적으로 보였다. 나는 그들 중 하나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지만』
『히익!』
그는 내 목덜미를 보더니 괴이한 소릴 내며 뒷걸음쳤다. 나는 끈질기게 그에게 다가가며 이야기를 시도했다.
『아.. 길을 좀 물으려는데요』
『야생 인간이다!』
그는 나를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순간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나는 당황했다. 원래부터 그다지 시선을 좋아하는 타입이 아닌지라 내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리 가, 저리 가! 전염병 옮는다고!』
『저 얼굴 시뻘개진 것 좀 봐! [바깥병]에 걸린 게 틀림없어!』
사람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들이 돌멩이를 집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주춤주춤 물러서다가 뒤로 돌아 도망쳤다. 돌멩이 한 개가 발목에 맞은 듯 시큰한 통증이 전해졌다. 길에서 벗어나 숲 속으로 접어들었다. 시커멓고 어두운 숲 속으로.
그 때 뒤에서 짐승의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크앙』
『치잇 치칫-』
다양한 종의 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원숭이과로 추정되는 한 마리와 고양이과로 추정되는 한 마리가 나를 쫓고 있었다. 꽤 빠른 속도였다. 숨이 차도록 달렸지만 조금씩 거리가 좁혀져 왔다.
나는 쫓기는 자들이 늘 그러하듯 아래로 강이 흐르는 절벽에 맞닥뜨렸다. 구름다리는 저 먼 곳에 있었다. 거기까지 가기 전에 틀림없이 잡히리라. 나는 그 짐승들이 나를 덮치는 순간 뒤로 떨어져 둘을 저승 길동무로 삼을 생각으로 절벽을 등에 지고 그들이 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그들은 내 조금 앞에서 멈추어 섰다.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것들은 말을 했다.
『내 가축으로 들어와라. 대우는 섭섭하지는 않게 해 주마』
고양이과 녀석은 이렇게 말했고,
『웃기는 소리. 발톱이 날카로운 네놈은 노예를 잡아먹기로 유명하잖아? 침실과 부엌 두 군데에서』
원숭이과로 추정되는 녀석은 이렇게 말했다. 게다가 둘 다 직립이었다. (다행히도 그들의 딸랑이는 그들이 아랫죽지에 두른 천으로 인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혼란을 느꼈다.
『사람 같은 짓을 하네...』
『우리가 사람이라네. 너 같은 종은 그저 미개하고 연약하여 우리가 부리고 있는 가축종이고』
혼란은 점점 커졌다. 나는 불현듯 어깻죽지가 가렵다고 느꼈다. 둘은 나를 앞에 두고 말다툼을 시작했다. 네놈이 더 많이 잡아먹었지 않느냐고, 더 험하게 다루지 않느냐고 본인이 뭐라고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는데도 격하게 김치국을 마셔댔다. 잠깐 고개를 돌리고 고양이과가 말했다.
『이놈의 집에서는 전염병으로 죽어나간 인간도 여럿이야』
원숭이과도 덩달아 말했다.
『이놈의 말은 믿지 마』
어깻죽지가 조금씩 아파 왔다. 나는 말했다.
『그런 거 별로 신경 쓰지 않는데. 전염병 같은 것엔 걸리지도 않았고』
원숭이과와 고양이과는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던 것 같다.
『좋아, 그러면』
원숭이과가 말했다.
『그냥 식사로 쓰도록 하지』
고양이과가 말했다.
그리고 그 둘은 나에게 덤벼들었다. 나는 뒤돌아 뛰었다. 두 발자국 딛자 절벽의 끝에 도달했다. 나는 눈을 감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찔한 낙하감. 나는 등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나는 떨어지는 데 공포감을 느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몸무게가 무거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낙하 방향과 반대되는 가속도가 나에게 작용하고 있었다. 나는 유연하게 선회하고는 위로 치솟아 올랐다. 나는 그렇게 올라가 절벽 끝에서 나를 쳐다보는 짐승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크게 화나 울부짖었다. 그리고 서로 물고 뜯으며 싸우기 시작했다.
『크우어어어어어!』
그들을 보며 나는 날고 있었다.
어깨에서부터 뜨뜻한 느낌이 들었다. 손으로 더듬어보니 축축했다. 손을 보았다. 피였다. 어깨에서 날개가 돋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까 일을 생각하고는 시험삼아 조금 방향을 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게 새로 생긴 기관을 전혀 어려움 없이 다룰 수 있었다. 나는 오른쪽으로 선회했다. 비행의 느낌은 이런 것이구나. 여과 없이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환희에 차 크게 소리질렀다.
『이 멍청이들아아아아! 나 난다! 날고 있다고!』
나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비행은 기분 좋은 것이었다. 나는 넓게 벌어진 벼랑을 건넜다. 건너편에서는 여전히 짐승들이 물고 뜯으며 싸우고 있었다. 고양이과가 매우 우세해 보이긴 했지만.
나는 그들이 싸우는 반대쪽의 벼랑 위에 착지했다. 그리고 어깨와 등 쪽을 더듬어 보았다. 무언가가 불쑥 돋아 있었다. 꽤 긴 것 같았다. 등에 제일 가까운 아랫부분은 피로 젖어 질척하긴 했지만 분명히 조금 위쪽은 포근하고 북실북실한 깃이었다. 새에게나 달려 있는 깃털. 나는 날개를 퍼덕여 보기로 했고 날개는 움직였다. 내 손으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원숭이과 녀석의 것으로 추정되는 처절한 비명이 들려 나는 날개에 집중하던 신경을 벼랑 너머로 돌렸다. 놈은 고양이과에게 뜯어 먹히고 있었다. 나도 늦었다면 아마 저리되었으리라. 소름이 돋았다. 오한이 들었다. 어깨가 너무나 아프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긴장. 공포. 피곤. 나는 그대로 정신을 놓았다.
[3]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사람들을 만났다.
홀에 있던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았다. 나와 때를 같이하여 니트도 홀에 당도했다.
『무사 귀환을 축하한다. 치노』
『동감이야. 니트』
헤이탄과 루디가 사과 조각을 나와 니트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먹었다. 새콤하고 달콤한 사과의 풍미가 입안에 퍼진다. 나는 으레 그렇듯 감탄해 준다.
『맛있다-』
『독이야.』
레겐이 말했다. 나는 대꾸했다.
『우리한테는 독이 아니잖아. 그럼 된 거지』
『기본적으로 해롭다는 것은 변하지 않아.』
레겐은 사과를 먹지 않는다. 늘 레겐은 저런 식이다. 나는 레겐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만년 회의주의자. 저놈은 그냥 두면 혼자서는 아무 것도 불안해서 못 할 거야. 그렇다고 내게 레겐을 혼내고 어쩌고 할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그놈은 이 곳의
두뇌와 같은 놈이다. 그러므로 그가 옳다면 아무튼 '대체로 옳다고 했으니 옳겠지 뭐' 라는 생각으로 따라 줘야 한다. 그런 식으로 이 녀석은 꽤 많은 수의 목숨을 구했으니까. 그러나 이 녀석이 배신하게 된다면 아마도 여기 게토에 거주하는 우리 중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헤이탄, 루디, 니트와 함께 이 녀석을 감시하고 있다.
그 스스로도 그렇게 말했었던 탓이기도 하지만.
『나 피곤해. 할 말 없으면 잘 거예요』
레겐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내 방으로 향했다. 잠이 들었었다.
오래간만에 꿈을 꾸었다.
절벽 건너에서 눈을 뜨자 루디와 헤이탄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멍한 상태에서 그들의 손을 잡았다.
다음 장면에 배경은 바뀌어 우리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눈을 뜨자 밤이었다. 나는 일은 아무튼 체력을 많이 소모한다. 등 근육이 조금 쑤셨다. 다음 기동이 언젠지를 알기 위해 홀로 향했다. 생산 담당인 옌티와 루마를 빼고는 전투원 모두가 모여 있었다. 나는 레겐과 게르하르트 사이에 서서 레겐에게 무성의한 거수 경례를 붙였다. 레겐이 입을 열었다.
『늦었군』
『날았으니까 피곤했어.』
나는 간단하게 답했다. 내 뒤에 있던 게르하르트가 킁 하고 내 냄새를 맡았다.
레겐은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
나는 게르하르트의 콧등을 톡 치고는 루디의 옆에 가 섰다. 나는 루디에게 속삭여 물었다.
『오늘 밤은 누구래?』
루디는 속삭임으로 대답해 주었다.
『당연히 수민. 그리고 보조는 헤이탄. 야시경 달아준대. 필요 없지 않나?』
나는 풉 하고 웃었다. 레겐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뭐냐, 치노?』
나는 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전체 녀석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나는 루디의 말을 그대로 건의했다. 물론 루디의 이름은 뺐다. 문제아는 하나로 족했다.
『에- 그러니까 말이지. 헤이탄은 고양이과니까 야시경이 필요없지 않아?』
레겐은 잠시 생각했다. 그는 결론을 내렸다.
『헤이탄이 아무리 보조고 고양이과라도 야간 정찰이 처음이야. 아무튼 지급하는 게 나을 거라고 본다』
너무 모범적인 대답. 역시 레겐답다. 재미없다. 전체 녀석들은 다시 시선을 레겐에게 돌렸다. 레겐이 내가 놓치지 않은 유일한 파트인 귀환 파트를 설명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튼 별로 듣지 않았다. 레겐이 말을 맺었다.
『여기의 전원이 내일 아침의 해를 감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모두 쉬도록』
나는 방으로 향했다.
내일 아침의 해를 볼 수 있을까?
오늘밤은 무사히 보낼 수 있는 것인가 하고 걱정을 했다. 조금 긴장했던 것 같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또 쓰러질지도 모른다. 단지 피로와 긴장 때문에 쓰러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서랍을 열었다. CDP의 차가운 몸체와 거기서 나온 선이 잡힌다. 더듬거려 이어폰을 서랍 밖으로 잡아뺐다. 귀에 끼었다. 이어폰과 CDP를 이어주고 있는 리모컨을 눌렀다. 익숙한 멜로디가 흐르고, 금세 미친 듯 날뛰던 심장이 느릿느릿 제 리듬을 찾아 간다. 진정된다. 긴장이 사그라든다. 그 날 이전에는 살아있는 것을 느끼지 못하던 내가 그 날 이후에서야 새삼 살아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공상 속에서만 살아왔던 내가 공상 속의 바로 그 존재가 되어 살아 숨쉬고 있다.
2002.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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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좀 그렇게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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